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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이 이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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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쓰이 이와네는 1878년 일본 아이치현 나고야에서 태어난 일본 제국 육군 군인이다. 육군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러일 전쟁에 참전했으며, 육군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는 범아시아주의를 주창하며 일본과 중국의 협력을 강조했고, 대아시아 협회를 설립하여 아시아 민족의 통일과 해방을 목표로 활동했다. 중일 전쟁 발발 후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중지나 방면군 사령관을 역임하며 난징 점령을 지휘했으나, 난징 대학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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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이 이와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와네 마쓰이 장군 (1933년경)
이와네 마쓰이 장군 (1933년경)
이름마쓰이 이와네 (松井 石根)
출생1878년 7월 27일
출생지아이치현 나고야시
사망1948년 12월 23일
사망 장소도쿄 스가모 형무소
사망 원인교수형
군사 경력
소속일본 제국 육군
복무 기간1897년 – 1938년
최종 계급육군 대장
주요 지휘제11사단
타이완군
상하이 파견군
중부 지나 방면군
참전 전투러일 전쟁
시베리아 출병
중일 전쟁
상하이 전투
시행 창고 방어전
난징 전투
수상금치훈장 1등
욱일장 1등
서보장 1등
승리 훈장
종군기장
재판 및 형벌
유죄 판결전쟁 범죄
형벌사형
재판극동 국제 군사 재판
범죄 상태사형 집행
가족 관계
배우자후미코 이소베 (1912년 결혼)
기타
사후 활동대아시아 협회 회장
매장지순국 칠사 묘
야스쿠니 신사

2. 생애

마쓰이 이와네는 1878년 7월 27일 아이치현 오와리번의 번사였던 아버지 마쓰이 다케쿠니와 어머니 히사 사이에서 6남으로 태어났다.[139] 아이치현아이치군 마키노촌(현 나고야시나카무라구마키노정) 출신으로, 세이조 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유년 학교에 진학했다.

청년 시절, 마쓰이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러일 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가와카미 소로쿠와 아라오 세이의 영향을 받아 일본과 중국의 협력을 통한 아시아 질서 재구축 필요성을 주장했다.[139]

연도사건
1893년세이조 학교 졸업
1896년육군 중앙유년학교 졸업
1897년육군사관학교 졸업 (9기)
1898년소위 임관, 보병 제6연대 배속
1900년중위 진급
1904년러일 전쟁 참전 (~1906년), 대위 진급, 보병 제6연대 중대
1905년제2군 부관, 제2군 병참감부 참모
1906년육군대학교 졸업 (18기), 참모본부 근무
1907년청나라 (베이징, 상하이) 주재 (~1911년)
1908년참모본부원
1909년소령 진급
1913년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출장
1914년구미 출장 (~1915년)
1915년중령 진급, 보병 제22연대 배속, 참모본부 부속 (상하이 주재) (~1919년)
1918년대령 진급



중일 전쟁 이전, 마쓰이는 쑨원의 대아시아주의에 공감하여 신해혁명을 지원했고, 중국국민당의 위안 스카이 타도에도 협력했다.[139] 1933년에는 대아세아협회 설립 발기인이 되었고, 같은 해 8월에 타이완 아시아 협회를 설립했다.[25] 장제스와도 친교가 깊어, 장제스가 정치적으로 곤란할 때 다나카 기이치 수상과의 회담을 성사시키기도 했다.[140]

마쓰이는 쑨원의 대아시아주의에 깊이 공감하여 그의 혁명 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1927년 9월, 장제스가 정치적 위기에 처했을 때, 마쓰이는 장제스의 일본 방문을 주선하고 다나카 기이치 총리와의 회담을 통해 위기 탈출을 도왔다.[140]

마쓰이는 중국이 장제스에 의해 통일될 것을 예측하고, 일본이 장제스를 지원하여 중국 통일을 돕고, 그 대가로 만주와 몽골에서의 특수 권익과 개발을 승인받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140]

그러나 장제스와의 연계를 통한 아시아 보전 구상은 결국 파탄났다. 그럼에도 마쓰이는 1933년 3월 1일에 대아세아협회를 설립하여 "구미 열강에 지배되는 아시아"에서 벗어나 "아시아인을 위한 아시아"를 실현하고자 했다.[139] 1934년 1월 6일, 대아세아협회 타이완 지부가 설립되었고, 마쓰이는 명예 고문에 취임했다. 1935년 8월, 마쓰이는 현역에서 물러나 예비역이 되었다.

마쓰이는 당시 국제 연맹이 극동 문제에 대한 이해 없이 유럽 국가들의 손에 좌우되어 일중 양국의 반목을 격화시킨다고 비판했다.[141]

연도내용
1919년보병 제39연대장
1921년블라디보스토크 파견군 참모
1922년관동군사령부 부속 (하얼빈특무기관장)
1923년소장으로 승진
1924년보병 제35여단
1925년참모본부 제2부장
1927년중장으로 승진
1928년참모본부 부속 (구미 출장)
1929년제11사단장
1931년제네바 일반 군축 회의 전권 위원
1933년군사참의관, 대만군 사령관, 육군 대장으로 승진, 훈1등 서보장 수여
1934년훈1등 욱일대수장 수여
1935년예비역 편입



중일 전쟁 발발 전 마쓰이 이와네는 예비역이었으나, 상하이 전투가 발발하면서 군무에 복귀하여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으로 상하이에 파견되었다.[36] 참모본부와 일본 제국 정부는 상하이 사건이 확대되지 않기를 바랐지만, 마쓰이는 상하이 부근으로 한정된 권한을 벗어나 당시 수도였던 난징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1937년 9월 상하이 전선 시찰 중인 마쓰이


11월 7일, 마쓰이는 일본 중지나 방면군(CCAA)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는 상하이 파견군(SEA)과 제10군에 통일된 지휘 체계를 제공하기 위한 직책이었다.[50] 12월 2일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친왕이 그의 뒤를 이어 지휘권을 넘겨받을 때까지 SEA 사령관을 겸임했다.[51] 육군 참모본부는 전쟁을 억제하려 했고, CCAA 창설과 동시에 CCAA가 상하이 근교를 벗어나는 것을 금지하는 "작전 제한선"을 설정했다.[52]

그러나 마쓰이는 난징 점령 결의를 밝히며, 중국과의 전쟁은 난징을 장악해야 끝날 것이라고 주장했다.[36][53] 12월 1일, 육군 참모본부는 난징 공격 작전을 승인했다.[56]

마쓰이는 12월 5일부터 15일까지 결핵으로 병상에 누워있었지만, 병상에서 명령을 내리며 의무를 다하려 했다.[59][60] 12월 7일, 그는 지휘소를 쑤저우로 옮겼고, 12월 9일에는 난징 상공에 "항복 권고문"을 투하했다.[62] 중국군이 응답하지 않자, 다음 날 마쓰이는 전면 공격을 승인했다.

일본군은 12월 12일/13일 밤에 난징을 점령했다.[64] 이후, 일본군들은 난징 대학살로 알려진 전쟁 포로 학살, 무차별 살인, 약탈, 고문, 강간을 자행했다.[65]

1937년 12월 17일 난징으로 진입하는 마쓰이


난징성 중산문 내 고궁 비행장 전몰 용사 위령제에서 조사를 낭독하는 마쓰이 이와네(1937년 12월 18일)


마쓰이는 일본군의 만행을 보고받고, "그러한 행위가 불가피하다"고 일기에 적었다.[74][75] 1938년 2월 7일, 마쓰이는 부하들을 소집하여 "지난 50일 동안 많은 끔찍한 사건"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해 질책했다.[74][81][82][83]

마쓰이 이와네는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난징 대학살을 비롯한 범죄에 대한 책임을 게을리했다는 이유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188][189] 1948년 12월 23일 스가모 형무소 내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고, 1978년에는 다른 A급 전범들과 함께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의 마쓰이 이와네


마쓰이는 재판에서 일본이 아시아를 서구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고 주장했다.[117] 난징 대학살에 대해서는 개별 범죄는 알았지만, 대규모 학살은 부인했다.[118]

마쓰이가 IMTFE 심리를 듣고 있다


결국 재판부는 난징 대학살에 대한 그의 역할로 유죄를 선고하고, 55조에 따라 사형을 선고했다.[122]

마쓰이의 유해가 아타미의 고아 관음에 비밀리에 묻혔다


마쓰이의 유해는 비밀리에 고아 관음에 안치되었고,[127] 1978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128]

2. 1. 출신

아이치현 오와리번의 번사였던 마쓰이 다케쿠니(松井武国, 아버지)와 히사(어머니) 사이에서 6남으로 태어났다.[139] 아이치현아이치군 마키노촌(현 나고야시나카무라구마키노정) 출신으로, 세이조 학교를 졸업하고 육군 유년 학교에 진학했다.

2. 2. 청년 시절

마쓰이 이와네는 1878년 7월 27일 나고야에서 도쿠가와 막부 시대 오와리 번 다이묘의 가신이었던 가난한 사무라이 마쓰이 다케쿠니의 여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3][4] 초등학교 졸업 후, 부모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빚을 걱정하여 학비가 가장 저렴한 군사 학교를 선택, 육군에서 경력을 쌓기로 결심했다.[5]

1893년 중앙 육군 예비 학교에 입학, 1896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4] 1897년 11월에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의 급우들 중에는 훗날 장군이 된 마사키 진자부로, 아베 노부유키, 혼조 시게루, 아라키 사다오 등이 있었다.[5] 1901년에는 육군대학에 입학했다.[6]

1904년 2월, 러일 전쟁 발발로 육군대학이 문을 닫자 제6연대 전투 부대의 중대장으로 만주에 파견되었다.[7] 수산포 전투 중 부상을 입었고, 그의 중대 대부분이 사망했다. 전쟁이 끝난 후, 육군대학에 복귀하여 1906년 11월에 수석으로 졸업했다.[5]

마쓰이는 재학 중 가와카미 소로쿠가 제창한 "일본군의 존재 이유는 동양의 평화 확보에 있다"는 견해에 감명을 받았다. 가와카미는 일본과 중국의 협력을 통한 아시아 질서 재구축 필요성을 주장했고, 마쓰이는 이에 공감하여 중국에 대한 관심을 깊게 했다.[139] 또한, 마쓰이는 아라오 세이의 사상에도 영향을 받았다.[139] 아라오는 구미 열강에 맞서 아시아 국가들이 연대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고, 마쓰이는 이러한 생각에 깊이 공감하여 훗날 대아시아협회 창립의 토양이 되었다.[139]

다음은 마쓰이 이와네의 청년 시절 주요 이력이다.

연도사건
1893년세이조 학교 졸업
1896년육군 중앙유년학교 졸업
1897년육군사관학교 졸업 (9기)
1898년소위 임관, 보병 제6연대 배속
1900년중위 진급
1904년러일 전쟁 참전 (~1906년), 대위 진급, 보병 제6연대 중대
1905년제2군 부관, 제2군 병참감부 참모
1906년육군대학교 졸업 (18기), 참모본부 근무
1907년청나라 (베이징, 상하이) 주재 (~1911년)
1908년참모본부원
1909년소령 진급
1913년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출장
1914년구미 출장 (~1915년)
1915년중령 진급, 보병 제22연대 배속, 참모본부 부속 (상하이 주재) (~1919년)
1918년대령 진급


2. 3. 중일 전쟁 이전 활동

마쓰이 이와네는 세이조 중고등학교, 일본 육군사관학교, 일본 육군대학교를 졸업하고 러일 전쟁에 참전했다. 중국 주재 중 쑨원의 대아시아주의에 공감하여 신해혁명을 지원했고, 중국국민당의 위안 스카이 타도에도 협력했다.[139] 1933년에는 대아시아 협회 설립 발기인이 되었고, 같은 해 8월에 타이완 아시아 협회를 설립했다.[25] 일본에 유학했던 장제스와도 친교가 깊어, 장제스가 정치적으로 곤란할 때 다나카 기이치 수상과의 회담을 성사시키기도 했다.[140]

마쓰이는 쑨원의 대아시아주의에 깊이 공감하여 그의 혁명 활동을 적극 지원했다. 육군 참모 본부의 우츠노미야 타로는 미쓰비시 재벌의 이와사키 히사야에게 10만 엔의 자금을 제공하게 하여 마쓰이에게 맡겨 쑨원을 지원하도록 했다.[139]

마쓰이는 장제스와도 깊은 친분을 유지했다. 1927년 9월, 장제스가 정치적 위기에 처했을 때, 마쓰이는 장제스의 일본 방문을 주선하고 다나카 기이치 총리와의 회담을 통해 위기 탈출을 도왔다.[140] 다나카 총리는 장제스에게 양쯔강 이남 장악에 주력하고, 북벌을 서두르지 말 것, 공산주의 확산을 경계하고 방지할 것, 그리고 일본은 이 두 가지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세 가지 점을 언급했다. 최종적으로 두 사람 사이에서는 국민 혁명이 성공하고 중국 통일이 완성되면 일본은 이를 승인하고, 국민 정부는 만주에서의 일본의 지위와 특수 권익을 인정한다는 합의가 이루어졌다.[140]

마쓰이는 중국이 장제스에 의해 통일될 것을 예측하고, 일본이 장제스를 지원하여 중국 통일을 돕고, 그 대가로 만주와 몽골에서의 특수 권익과 개발을 승인받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140]

그러나 장제스와의 연계를 통한 아시아 보전 구상은 결국 파탄났다. 그럼에도 마쓰이는 1933년 3월 1일에 대아세아협회를 설립하여 "구미 열강에 지배되는 아시아"에서 벗어나 "아시아인을 위한 아시아"를 실현하고자 했다. 마쓰이는 "일중의 제휴가 제일 조건이다"라는 대아세아주의를 내세웠다.[139] 1934년 1월 6일, 대아세아협회 타이완 지부가 설립되었고, 마쓰이는 명예 고문에 취임했다. 1935년 8월, 마쓰이는 현역에서 물러나 예비역이 되었다.

마쓰이는 당시 국제 연맹이 극동 문제에 대한 이해 없이 유럽 국가들의 손에 좌우되어 일중 양국의 반목을 격화시킨다고 비판했다.[141]

마쓰이의 주요 이력은 다음과 같다.

연도내용
1893년세이조 학교 졸업
1896년육군 중앙유년학교 졸업
1897년육군사관학교 졸업 (9기)
1898년소위로 승진, 보병 제6연대 부속
1900년중위로 승진
1904년러일 전쟁 종군 (~1906년), 대위로 승진
1906년육군대학교 졸업 (18기 은사), 참모본부 출사
1907년 ~ 1911년청나라 (베이징・상하이) 주재
1908년참모본부원
1909년소령으로 승진
1913년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출장
1914년 ~ 1915년구미 출장
1915년중령으로 승진, 보병 제22연대 부속, 참모본부 부속 (상하이 주재, ~1919년)
1918년대령으로 승진
1919년보병 제39연대장
1921년블라디보스토크 파견군 참모
1922년관동군사령부 부속 (하얼빈특무기관장)
1923년소장으로 승진
1924년보병 제35여단
1925년참모본부 제2부장
1927년중장으로 승진
1928년참모본부 부속 (구미 출장)
1929년제11사단장
1931년제네바 일반 군축 회의 전권 위원
1933년군사참의관, 대만군 사령관, 육군 대장으로 승진, 훈1등 서보장 수여
1934년훈1등 욱일대수장 수여
1935년예비역 편입


2. 4. 중일 전쟁

중일 전쟁 발발 전 마쓰이 이와네는 예비역이었으나, 상하이 전투가 발발하면서 군무에 복귀하여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으로 상하이에 파견되었다.[36] 참모본부와 일본 제국 정부는 상하이 사건이 확대되지 않기를 바랐지만, 마쓰이는 상하이 부근으로 한정된 권한을 벗어나 당시 수도였던 난징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상하이로 항해하는 동안 마쓰이는 일본 해군이 작성한 계획을 채택하여 상하이 파견군(SEA)을 상하이 북쪽의 우쑹과 추안사코우 두 상륙 지점으로 분할하고, 전자를 사용하여 상하이를 직접 공격하고 후자를 사용하여 중국군을 포위하는 계획을 세웠다.[41] 8월 23일 마쓰이는 기함 ''유라''에서 상륙 작전을 지휘했다.[42] 초기 상륙은 순조로웠지만, 육상 전투는 점차 격렬해졌고 사상자도 늘어났다.[43] 마쓰이는 이 임무를 수행하기에 충분한 병력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여 고위 지휘부에 계속 증원군을 요청했다.[44] 9월 10일이 되어서야 마쓰이는 상하이에 상륙할 수 있었는데, 이날 육군 참모부는 그에게 3개 사단이 추가로 배치될 것이라고 알렸다.[45] 그러나 이 병력 투입으로도 중국군을 몰아내기에는 부족했다.[43] 10월 초, 마쓰이는 중국군이 상하이에서 철수하려 한다고 잘못 판단하여 11월 전에 작전이 마무리될 것으로 예상하고 중국 진지에 보병 돌격을 명령했다.[46] SEA는 그 시점에도 난샹과 쑤저우강에서 중국군의 방어선을 계속 공격하고 있었다. 11월 5일 야나가와 헤이스케가 이끄는 제10군이 상하이 남쪽에 상륙하여 중국군이 급히 후퇴하면서 전환점이 나타났다.[43] 상하이는 11월 26일에 함락되었다.[47]

전투는 중국 민간인에게도 피해를 입혔고, 마쓰이는 전투가 절정에 달했을 때도 중국 난민의 처지에 관심을 기울였다.[48] 10월에 그는 중국 난민 캠프의 생활 환경을 개선하라고 명령했고, 자퀴노 신부가 상하이에 중국 민간인을 위한 "안전 지대"를 설치하는 것을 돕기 위해 10,000달러를 기부했다.[48][49]

11월 7일, 마쓰이는 일본 중지나 방면군(CCAA)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는 상하이 파견군(SEA)과 제10군에 통일된 지휘 체계를 제공하기 위한 직책이었다.[50] 마쓰이는 12월 2일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친왕이 그의 뒤를 이어 지휘권을 넘겨받을 때까지 SEA 사령관을 겸임했다.[51] 육군 참모본부는 전쟁을 억제하려 했고, CCAA 창설과 동시에 CCAA가 상하이 근교를 벗어나는 것을 금지하는 "작전 제한선"을 설정했다.[52]

그러나 마쓰이는 8월에 일본을 떠나기 전부터 상관들에게 난징 점령 결의를 밝혔다. 난징은 상하이에서 서쪽으로 300km 떨어진 곳에 있었다.[36] 마쓰이는 중국과의 전쟁은 난징을 장악해야 끝날 것이라고 주장하며, 난징 함락이 장제스 정부의 붕괴를 초래할 것이라고 예상했다.[36][53]

11월 19일, 야나가와 헤이스케의 제10군이 작전 제한선을 넘어 난징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56] 마쓰이는 야나가와를 제지하려 했지만, 난징 진격이 올바른 행동이라고 상부에 주장했다.[54] 12월 1일, 육군 참모본부는 난징 공격 작전을 승인했지만, 이미 현장 일본군 부대들은 상당 부분 진격한 상태였다.[56]

마쓰이는 자신의 뜻을 관철했지만, 병사들이 상하이 전투로 지쳐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55] 그는 두 달 안에 도시를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천천히 진격하기로 결정했다.[56] 그러나 그의 부하들은 이에 따르지 않고 서로 경쟁하며 난징에 먼저 도착하려 했다.[57] 마쓰이는 군대가 예정된 작전 목표보다 훨씬 앞서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서야 계획을 수정했다.[58]

마쓰이의 지휘 문제는 11월 4일에 처음 증상이 나타난 결핵으로 인해 12월 5일부터 15일까지 병상에 누워있었다는 사실로 더욱 복잡해졌다.[59][60] 병에 걸렸음에도 그는 병상에서 명령을 내리며 의무를 다하려 했다.[61] 12월 7일, 그는 전선에 더 가까이 가기 위해 지휘소를 상하이에서 쑤저우로 옮겼고, 12월 9일에는 난징 상공에 비행기로 "항복 권고문"을 투하하라고 명령했다.[62] 중국군이 응답하지 않자, 다음 날 마쓰이는 전면 공격을 승인했다.

일본군의 공격에 굴복한 난징 방어 중국 수비대는 붕괴되었지만, 중국 군인들은 정식 항복 대신 군복과 무기를 버리고 민간인과 합류했다. 일본군은 12월 12일/13일 밤에 난징을 점령했다.[64] 이후, 일본군들은 난징 대학살로 알려진 전쟁 포로 학살, 무차별 살인, 약탈, 고문, 강간을 자행했다.[65]

12월 16일 마쓰이는 난징 동쪽 탕수이전 온천에서 말라리아를 치료했고, 다음 날 대규모 승리 행렬 선두에서 난징으로 들어갔다.[72] 마쓰이가 난징에서 자행된 만행을 어느 정도 알았는지는 불분명하다. 그의 전 동남아시아 전선 참모장은 마쓰이가 도시에 들어간 직후 "약탈과 폭행 사건"을 보고받았다고 증언했고,[73] 마쓰이의 일기에도 일본군이 강간과 약탈을 했다는 보고를 받았다는 내용이 있다.[74] 마쓰이는 일기에 "진실은 그러한 행위가 불가피하다"고 적었다.[75] 일본 외무성 대표가 이 문제를 조사하러 왔을 때 마쓰이는 일부 범죄 발생을 인정하고, 명령을 어기고 많은 병력을 도시에 진입시킨 부하들을 비난했다.[76]

마쓰이는 12월 22일 난징을 떠나 상하이로 돌아갔지만, 일본군이 난징에서 저지른 사건 보고는 다음 달에도 계속 들어왔다.[80] 1938년 2월 7일 마쓰이가 이틀간 순찰을 위해 난징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친왕과 야나가와 헤이스케를 포함한 부하들을 소집하여 "지난 50일 동안 많은 끔찍한 사건"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해 질책했다.[74][81][82][83]

난징 점령 직후, 일본군에 의한 난징 대학살[186]이 시작되었으나, 그는 와병 중이어서 현장을 이탈하여 통제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진상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일기에 일본군의 만행을 기록하면서, 이는 황군의 명예에 먹칠하는 것이라고 유감을 표했다. 또한 난징 대학살 이후에도 이러한 잔혹 행위는 황군의 불명예라고 부하들을 꾸짖었다. 그러나 이미 사건은 크게 터져버린 이후였다.

2. 5. 패전과 극동 국제 군사 재판

마쓰이 이와네는 중일 전쟁 발발 전에는 예비역이었지만, 상하이 전투가 발발하면서 군무에 복귀,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으로 상하이에 파견되었다. 참모본부와 일본 제국 정부는 상하이 사건이 확대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마쓰이 이와네는 상하이 부근으로 한정돼있던 권한을 일탈, 당시 수도였던 난징을 공격해 점령하였다.

난징 점령 직후, 일본군에 의한 잔혹행위 (난징 대학살[186])가 시작되었으나, 그는 와병 중이어서 현장을 이탈, 이를 통제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진상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일기에 일본군의 만행을 기록하면서, 이는 황군의 명예에 먹칠하는 것이라고 유감의 뜻을 표하기도 하였다. 또한 난징 대학살 이후에도 이러한 잔혹 행위는 황군의 불명예라고 부하들을 꾸짖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미 사건은 크게 터져버린 이후였다.

마쓰이 이와네는 전쟁 후에 민간인 신분으로 전쟁범죄자로 체포되어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 기소되었다. 마쓰이 이와네가 사령관을 맡은 화중군이 난징에서 자행한 대학살을 비롯한 범죄에 대한 처벌을 게을리했다는 이유로 사형 판결을 받는다.[188][189]

1948년 12월 23일 스가모 형무소 내에서 마쓰이 이와네를 비롯한 7명의 교수형이 집행되었고, 1978년에는 다른 A급 전범들과 함께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1946년 4월 29일, 마쓰이 이와네는 일본의 전쟁 범죄자를 재판하기 위해 제2차 세계 대전 연합국에 의해 설립된 극동 국제 군사 재판소(IMTFE)에서 공식적으로 기소된 28명 중 한 명이 되었다.[114] 검찰은 마쓰이를 A급 전쟁 범죄 또는 "평화에 대한 죄"로 기소했으며, 이는 그가 다른 국가에 대한 침략 전쟁을 수행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와 함께 1937년부터 1938년까지의 난징 대학살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B/C급 전쟁 범죄 또는 "통상적인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는 혐의를 포함했다.[60][115][116]

마쓰이는 스가모 형무소에 가기 전에 친구들에게 IMTFE에서 자신뿐만 아니라 일본의 전시 행위 전체를 변호할 계획이라고 말했다.[111] 마쓰이는 일본이 외국 열강의 침략에 대해 방어적으로 행동했으며, 일본의 전쟁 목표는 아시아를 서구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117] 제2차 중일 전쟁의 기원에 관해 마쓰이는 이를 "아시아 가족 내의 형제 간의 싸움"이라고 불렀으며, 전쟁이 중국인에 대항하여 벌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을 증오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가족 내에서 형이 버릇없는 동생에게 참을 만큼 참다가 그를 제대로 행동하도록 훈계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말했다.[39]

난징 대학살에 관하여 마쓰이는 강간, 약탈, 살인과 같은 개별 군인에 의해 저질러진 몇몇 고립된 범죄를 알고 있었지만, 도시에서 대규모 학살이 발생했다는 사실은 단호히 부인했다.[118]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쓰이는 IMTFE에서 그의 부하들의 잘못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진다고 인정했다. 그는 육군 지휘관이 아니라 개별 범죄 행위를 기소하는 것은 각 사단의 헌병대이므로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쓰이는 또한 모든 범죄자를 엄중히 처벌할 것을 촉구했다는 증언을 했는데, 검찰은 이 진술이 그가 어느 정도의 법적 책임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한다는 점을 신속히 지적했다.[119]

결국 IMTFE는 마쓰이에 대한 대부분의 기소를 기각했다. 그가 기소된 38가지 혐의 중 마쓰이는 A급 전쟁 범죄와 관련된 모든 혐의를 포함하여 37가지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109][120] 재판관들은 대아시아협회에 대한 마쓰이의 가입을 침략 전쟁을 수행하려는 "음모"에 연루된 증거로 받아들이지 않았다.[121]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징 대학살에 대한 그의 역할로 인해 그는 유죄 판결을 받았고, 전쟁법 위반을 확보하고 방지하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의도적이고 무모하게 무시"한 피고인들을 기소하는 55조에 따라 사형을 선고받았다.[122] IMTFE는 1948년 11월 12일에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123]

>재판소는 마쓰이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는 점에 만족합니다. 그는 이러한 끔찍한 일들을 줄이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거나, 효과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도시 점령 전에 그의 부대에게 행동의 적절성을 명령하는 명령을 내렸고, 나중에 같은 취지의 추가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명령들은 효과가 없었고, 그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사건에 책임이 있는 군대의 지휘관이었습니다. 그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부대를 통제하고 난징의 불운한 시민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 의무를 이행하지 못한 것에 대해 형사 책임을 져야 합니다.[124]

역사가 유마 토타니는 이 판결이 "국제법 역사상 지휘 책임에 대한 가장 초기의 선례 중 하나"라고 언급했다.[124]

판결을 들은 직후 마쓰이는 감옥의 목사인 하나야마 신쇼에게 난징의 잔혹 행위에 대한 그의 감정과 1938년 2월 7일 부하들에게 했던 질책에 대해 털어놓았다.[81] 그는 그 잔혹 행위가 러일 전쟁 이후 일본 육군의 도덕적 쇠퇴 때문이라고 비난하며 이렇게 말했다.

>난징 사건은 끔찍한 수치였습니다... 추도식을 마치자마자, 나는 고위 장교들을 소집하여 사령관으로서 분노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제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병사들의 잔혹 행위로 인해 한순간에 사라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그 후에도 이 장교들은 나를 비웃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내가 그 시대의 더 많은 군인들의 자기 반성을 촉구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런 식으로 끝났다는 것에 매우 만족합니다.[81]

1948년 12월 22일 밤, 마쓰이는 동료 사형수 도조 히데키, 무토 아키라, 도이하라 겐지를 교도소 예배당에서 만났다. 그룹의 맏형인 마쓰이는 그들에게 반자이(텐노 헤이카 반자이)를 삼창하도록 요청받았다. 그 후 그는 사형대로 그들을 이끌었고, 그들은 1948년 12월 23일 새벽 자정에 조금 지나 동시에 교수형에 처해졌다.[125][126]

마쓰이가 처형된 직후, 그는 화장되었고, 미군은 기념비가 세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의 유해를 가져갔다. 그러나 그들이 알지 못하게도, 화장터 주인이 유해의 일부를 숨겼다. 그는 나중에 이 유해를 마쓰이가 설립한 사원인 고아 관음에 가져갔고, 그곳에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127] 1978년, 마쓰이 이와네를 포함하여 IMTFE에 의해 처형된 7명의 모든 전범은 주임신부 마쓰다이라 나가요시에 의해 비밀리에 거행된 의식에서 야스쿠니 신사에 공식적으로 합사되었다. 이 사건은 다음 해까지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다.[128]

마쓰이는 1948년 12월 9일, 스가모 구치소에서 교화사 하나야마 신쇼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168]

>난징 사건에서는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난징 입성 후 위령제 때, 중국인의 죽은 사람도 함께 하자고 제가 말했더니[159], 참모장 이하, 아무것도 모르니 일본군의 사기에 관한 것이라고 말하며, 사단장 이하, 그런 짓을 했습니다. 저는 러일 전쟁 때 대위로 종군했는데, 그 당시 사단장과 이번 사단장 등을 비교해 보면, 문제가 안 될 정도로 나쁩니다. 러일 전쟁 때는 중국인은 물론 러시아인에게도 포로의 취급 등 잘 했습니다.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정부 당국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무사도나 인도라는 점에서는, 당대와는 전혀 달라졌습니다. 위령제 직후, 저는 모두를 모아 군 총사령관으로서 울면서 화를 냈습니다. 그때 아사카노미야도 계셨고, 야나가와 중장도 방면군 사령관이었는데, 모처럼 황위를 빛냈는데, 저 병사들의 폭행으로 일거에 그것을 떨어뜨렸습니다. 그런데, 그 후

3. 평가

마쓰이 이와네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난징 대학살의 책임자로 국제적인 비판을 받았다.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그는 난징에서 벌어진 대학살 및 기타 범죄 행위에 대한 책임을 게을리했다는 이유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188][189] 1948년 12월 23일 스가모 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고, 1978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일본 역사 문헌 대부분은 난징 대학살에서 마쓰이가 수행한 역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121] 마쓰이에 대해서는 부당하게 처형된 "비극적인 장군"이라는 동정론과 대학살의 피를 손에 묻힌 자라는 비방론이 공존한다.[31][121]

역사학자 요시다 유타카는 마쓰이가 대학살의 원인이 된 여섯 가지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다고 지적한다.[129] 여기에는 적절한 물류 지원 부족, 중국군 포로 보호 정책 미수립, 과도한 병력의 난징 진입 허용, 난징 안전 지대 국제 위원회와의 협력 부족 등이 포함된다. 역사학자 에구치 케이이치와 연구자 타나베 토시오 역시 마쓰이가 대학살로 이어진 정부의 난징 진격을 촉구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130]

반면, 야마모토 마사히로와 같은 역사학자들은 마쓰이가 대학살을 막지 못한 단순 과실에 대한 사형 선고는 너무 가혹했다고 주장한다.[131] 언론인 리처드 미네어는 고이소 구니아키는 4건, 시게미츠 마모루는 5건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징역형을 선고받은 반면, 마쓰이는 과실 혐의 1건만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는 점을 들어 마쓰이의 형벌이 다른 피고인들에 비해 과도하다고 지적한다.[132] 역사학자 카사하라 토쿠시는 극동 국제 군사 재판의 검찰이 마쓰이를 전체 잔혹 행위에 대한 유일한 희생양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133]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는 저서 "군국 지배자의 정신 형태"에서 마쓰이가 부하의 폭행에 대한 징벌에 대해 "전반적인 지휘관으로서 부하인 군 사령관, 사단장에게 그것을 희망하는 것 외에는 권한이 없습니다"라고 증언한 것을 인용하며, 마쓰이의 태도를 "권한 회피"라고 평가했다.[170] 그러나 우시무라 케이는 마쓰이가 같은 심문에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다고 답변한 것이 재판 기록에 남아 있으며,[172] 마루야마가 마쓰이의 답변을 의도적으로 생략했다고 비판했다.[173] 우시무라 케이는 마쓰이의 답변은 "도의상의 책임"과 "법률상의 책임"을 구별한 명료한 것이라고 재평가했다.[175]

중국에서는 마쓰이 이와네가 난징 대학살과 관련하여 "일본의 히틀러"로 불릴 정도로 악명이 높다.[134] 장제스1966년 9월에 다나카 마사아키 등에게 "난징에는 대학살 따위는 없었다. 마쓰이 각하는 억울한 누명으로 처형되었습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으나,[177] 장제스 자신의 공식 회고록인 『장제스 비록』에는 난징 대학살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178]

3. 1. 일본 내 평가

마쓰이 이와네에 대한 일본 내 평가는 크게 두 가지 관점으로 나뉜다.
긍정적 평가

  • 범아시아주의 옹호: 마쓰이는 아시아의 연대를 통해 서구 열강에 맞서야 한다는 범아시아주의를 신봉했다. 그는 장제스국민혁명군이 중국을 통일하고 일본과 협력하여 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이끌어야 한다고 믿었다.[16]
  • 중일 전쟁 조기 종결 노력: 중일 전쟁 발발 후, 마쓰이는 빠른 평화 협상을 통해 전쟁을 조기에 종결하려 했다. 그는 상하이 전투에서 승리한 후, 난징 점령을 평화적으로 진행하려 노력했다.[143][144][145][146]
  • 친중파: 마쓰이는 중국 전문가로서 중국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장제스를 강력하게 지지했으며, 지난 사건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등 중국과의 우호 관계를 중시했다.[16][17]

부정적 평가

  • 난징 대학살 책임: 마쓰이는 난징 대학살 당시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으로서, 대학살을 막지 못하고 방조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극동 국제 군사 재판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 전쟁 확대 책임: 마쓰이는 참모 본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난징으로 진격하여 전쟁을 확대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

다양한 관점

  • 논픽션 작가 하야사카 타카시는 마쓰이가 난징 점령을 평화적으로 진행하려 했던 점, 친중파로서의 사상,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의 모순 등을 지적하며 마쓰이를 옹호한다.
  • 다하라 소이치로는 마쓰이의 구상대로 일본과 장제스의 신뢰 관계가 유지되었다면 난징 대학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마쓰이 이와네에 대한 평가는 그의 범아시아주의적 신념과 난징 대학살 책임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측면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3. 2. 중국 내 평가

오늘날 중국에서 마쓰이 이와네는 난징 대학살의 주범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134] 중국 민간에서는 그를 "일본의 히틀러"라고 부르기도 한다.[134]

1945년 중국 공산당은 난징 대학살 때문이 아니라 초국수주의 단체를 위한 선전 활동을 이유로 마쓰이를 전범으로 비난했으나,[135] 현재는 난징 대학살에서의 그의 역할이 더 주목받고 있다.[136]

3. 3. 국제적 평가

마쓰이 이와네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난징 대학살의 책임자로 국제적인 비판을 받았다.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그는 난징에서 벌어진 대학살 및 기타 범죄 행위에 대한 처벌을 게을리했다는 이유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188][189] 1948년 12월 23일 스가모 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고, 1978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었다.

국제 사회는 마쓰이 이와네를 난징 대학살의 주요 책임자 중 한 명으로 평가한다. 역사학자 요시다 유타카는 마쓰이가 대학살의 원인이 된 여섯 가지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다고 지적한다.[129] 여기에는 적절한 물류 지원 부족, 중국군 포로 보호 정책 미수립, 과도한 병력의 난징 진입 허용, 난징 안전 지대 국제 위원회와의 협력 부족 등이 포함된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마쓰이에 대한 사형 선고가 너무 가혹했다고 주장한다.[131] 언론인 리처드 미네어는 고이소 구니아키와 시게미츠 마모루는 각각 4건, 5건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음에도 징역형을 선고받은 반면, 마쓰이는 과실 혐의 1건만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는 점을 들어 마쓰이의 형벌이 다른 피고인들에 비해 과도했다고 지적한다.[132]

중국에서는 마쓰이 이와네가 난징 대학살과 관련하여 "일본의 히틀러"로 불릴 정도로 악명이 높다.[134]

4. 사상

마쓰이 이와네는 한학자였던 아버지의 영향과 군사 교육 기간 동안 중국어를 공부하면서 중국 문명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5][8] 그는 중국에서 복무한 "대륙 낭인"이자 범아시아주의자 육군 장교였던 아라오 세이(1858–1896)를 존경했다.[20][9] 아라오는 아시아의 두 강대국인 중국과 일본이 서구 제국주의에 저항하기 위해 일본의 주도하에 긴밀한 협력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믿었고, 마쓰이는 이러한 생각을 자신의 세계관에 통합했다.

마쓰이는 육군 참모 본부의 프랑스 주둔 지시에도 불구하고, 1907년 중국으로 건너가 무관 보좌관으로 정보 업무를 수행했다.[12] 그는 1907년부터 1911년까지, 그리고 1915년부터 1919년까지 상하이 주재 장교로 근무하며 중국에 대한 깊은 애정을 키웠다.

마쓰이는 쑨원과 장제스 등 중국의 주요 인사들과도 교류했다. 특히 쑨원과는 깊은 우정을 나누었으며, 젊은 장제스가 일본 유학을 원했을 때 숙소 마련을 돕기도 했다.[15]

1931년 만주 침략 이후, 마쓰이는 서방 열강과 국제 연맹이 일본과 중국 간 갈등을 조장한다고 의심했다. 그는 아시아 국가들이 자체적인 "아시아 연맹"을 결성하여 서구 열강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20][21]

1933년 3월, 마쓰이는 대아세아협회(大亜細亜協会)를 설립하여 자신의 범아시아주의 구상을 적극적으로 홍보했다.[23] 그러나 중일 관계가 악화되면서, 마쓰이는 중화민국 국민 정부에 대해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중국 지도자들이 서구에 치우친 태도를 보인다며 비난했고, 나가타 데쓰잔 등 일본 군부 내 강경파의 주장에 동조하게 되었다.[28]

마쓰이는 쑨원의 대아시아주의에 공감하여 신해혁명을 지원하고, 위안스카이 타도에 협력하는 등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장제스와도 친분을 유지하며, 다나카 기이치 총리와의 회담을 주선하여 장제스의 정치적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기여했다.[140]

그러나 1928년 제남 사건과 장쭤린 폭사 사건으로 인해 중일 관계는 악화되었고, 마쓰이의 구상은 좌절되었다.[139] 만주 사변 이후 장제스가 반일 노선을 강화하면서, 마쓰이의 범아시아주의는 한계에 직면했다.

마쓰이의 범아시아주의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되었으며, 중일 전쟁난징 대학살의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마쓰이는 난징 대학살 방지 및 저지에 실패하고, 관계자 처벌을 게을리했다는 이유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165]

4. 1. 범아시아주의

마쓰이 이와네는 한학자였던 아버지의 영향과 군사 교육 기간 동안 중국어를 공부하면서 중국 문명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5][8] 그는 중국에서 복무한 "대륙 낭인"이자 범아시아주의자 육군 장교였던 아라오 세이(1858–1896)를 존경했다.[20][9] 아라오는 아시아의 두 강대국인 중국과 일본이 서구 제국주의에 저항하기 위해 일본의 주도하에 긴밀한 협력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믿었고, 마쓰이는 이러한 생각을 자신의 세계관에 통합했다.

마쓰이는 육군 참모 본부의 프랑스 주둔 지시에도 불구하고, 1907년 중국으로 건너가 무관 보좌관으로 정보 업무를 수행했다.[12] 그는 1907년부터 1911년까지, 그리고 1915년부터 1919년까지 상하이 주재 장교로 근무하며 중국에 대한 깊은 애정을 키웠다.

마쓰이는 쑨원과 장제스 등 중국의 주요 인사들과도 교류했다. 특히 쑨원과는 깊은 우정을 나누었으며, 젊은 장제스가 일본 유학을 원했을 때 숙소 마련을 돕기도 했다.[15]

1931년 만주 침략 이후, 마쓰이는 서방 열강과 국제 연맹이 일본과 중국 간 갈등을 조장한다고 의심했다. 그는 아시아 국가들이 자체적인 "아시아 연맹"을 결성하여 서구 열강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20][21]

1933년, 마쓰이는 대아세아협회(大亜細亜協会)를 설립하여 자신의 범아시아주의 구상을 적극적으로 홍보했다.[23] 그러나 중일 관계가 악화되면서, 마쓰이는 중화민국 국민 정부에 대해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중국 지도자들이 서구에 치우친 태도를 보인다며 비난했고, 나가타 데쓰잔 등 일본 군부 내 강경파의 주장에 동조하게 되었다.[28]

1935년, 마쓰이는 통제파의 일원이었던 나가타가 암살되자,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현역에서 물러났다.[28][29] 예비역이 된 후, 그는 범아시아주의 운동에 더욱 전념했다. 그는 중국을 순회하며 범아시아주의를 연설하고, 대아시아협회 지부를 설립했다.[31][32]

1936년, 시안 사건 이후 장제스가 중국 공산당과 연합하여 일본에 저항하자, 마쓰이는 이를 배신으로 여겼다.[34]

마쓰이는 쑨원의 대아시아주의에 공감하여 신해혁명을 지원하고, 위안스카이 타도에 협력하는 등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장제스와도 친분을 유지하며, 다나카 기이치 총리와의 회담을 주선하여 장제스의 정치적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기여했다.[140]

그러나 1928년 제남 사건과 장쭤린 폭사 사건으로 인해 중일 관계는 악화되었고, 마쓰이의 구상은 좌절되었다.[139] 만주 사변 이후 장제스가 반일 노선을 강화하면서, 마쓰이의 범아시아주의는 한계에 직면했다.

마쓰이의 범아시아주의는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되었으며, 중일 전쟁난징 대학살의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마쓰이는 난징 대학살 방지 및 저지에 실패하고, 관계자 처벌을 게을리했다는 이유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165]

4. 2. 대아시아 협회 활동

마쓰이 이와네는 1933년 3월, 범아시아주의를 표방하는 단체인 대아세아협회(大亜細亜協会)를 설립했다.[23] 이 단체는 "아시아 민족의 통일, 해방, 독립"을 목표로 내걸고,[23] 일본의 정치 및 군사 엘리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24]

마쓰이는 중국과의 협력을 통해 아시아를 보전하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위해 대아세아협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는 1935년 톈진에 대아세아협회 지부를 설립하고,[31][32] 같은 해 12월에는 대아세아협회 회장에 취임했다.[4] 1934년 1월 6일에는 대만 지부가 설립되어 마쓰이가 명예 고문에 취임했다.

1939년 4월, 마쓰이는 육군 미술 협회 회장에 취임했으며,[160] 같은 해 7월에 개최된 제1회 성전미술전에서는 전람회 명예 회장을 맡았다.[161]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마쓰이는 대아세아협회 회장으로서 1942년 6월부터 동남아시아 각지를 순방하며 대동아공영권 확립의 중요성을 역설했다.[139] 그는 난징의 왕징웨이, 버마의 바 모, 싱가포르찬드라 보스 등과 회담하며 일본의 전쟁 수행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5. 논란

마쓰이 이와네는 난징 대학살 등 여러 논란에 휩싸여 있다.

중일 전쟁 당시 상하이 전투에 참전한 마쓰이는 난징을 점령하였는데, 점령 직후 일본군에 의해 난징 대학살[186]이 발생했다. 마쓰이는 병으로 현장을 통제할 수 없었지만, 일본군의 만행을 일기에 기록하며 황군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유감을 표했다.[152] 또한 부하들에게도 이러한 잔혹 행위는 황군의 불명예라고 꾸짖었지만, 이미 사건은 크게 벌어진 뒤였다.[152]

마쓰이는 난징 공략 전 쑤저우에서 요양 중이었고, "난징성 공략 요령"을 통해 엄격한 군기를 강조했지만, 이는 현장에서 무시되었다. 난징 함락 후 입성식에 참여했지만, "의심스러운 자는 모두 처리"하라는 방침에 따라 민간인 학살이 발생했다.[150][151] 마쓰이는 군기 숙정을 재차 강조하고 중국인에 대한 경멸을 경계했지만,[139] 일본군의 중국인 포로 학대에 대해서는 무사도와 인도의 정신이 퇴색했다고 한탄했다.[153]

전후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마쓰이는 난징 대학살 방지 및 저지, 관계자 처벌을 게을리했다는 이유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165] 검사 조셉 키넌은 "마쓰이의 죄는 부하의 죄이기 때문에 종신형이 적절하다"라며 판결을 비판했다.[166] 마쓰이는 재판에서 대량 학살에 대한 공식 보고를 받지 못했다고 증언했지만, 판결은 "자신의 군대를 통제하고 난징 시민을 보호할 의무와 권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행을 게을리했다"라고 판결했다.[167]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는 마쓰이의 증언을 "권한 회피"라고 비판했지만,[170] 우시무라 케이는 마루야마가 마쓰이의 답변 일부를 의도적으로 생략했다고 비판했다.[172][173]

1948년 12월 23일, 마쓰이는 스 가모 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5. 1. 난징 대학살 책임 논란

중일 전쟁 발발 전에는 예비역이었지만, 상하이 전투가 발발하면서 군무에 복귀, 상하이에 파견되었다. 참모본부와 일본 제국 정부는 상하이 사건이 확대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마쓰이 이와네는 난징을 공격해 점령하였다.

난징 점령 직후, 일본군에 의한 잔혹행위 (난징 대학살[186])가 시작되었으나, 그는 와병 중이어서 현장을 이탈, 이를 통제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진상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일기에 일본군의 만행을 기록하면서, 이는 황군의 명예에 먹칠하는 것이라고 유감의 뜻을 표하기도 하였다. 또한 난징 대학살 이후에도 이러한 잔혹 행위는 황군의 불명예라고 부하들을 꾸짖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미 사건은 크게 터져버린 이후였다.[152]

마쓰이는 난징 공략을 12월 중순경으로 예상하고 병사들을 휴식시키고 있었다. 트라우트만 공작의 성과를 보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140][142] 하지만 11월 19일 제10군은 독단적으로(마쓰이의 지휘권을 무시하고) "난징 공략전"을 개시했고, 마쓰이도 난징으로의 진격을 참모 본부에 건의[147], 상하이 파견군도 난징으로 진격하여 제10군과 상하이 파견군 간의 선두 경쟁과 같은 상황이 되었다. 11월 28일, 참모 본부는 마침내 난징 공략 명령을 발했다.

난징으로 진군하는 중에 마쓰이는 난징 공략 전에 쑤저우에서 병을 치료하며 직접 공략전을 지휘할 수 없었다. 12월 7일, 요양 중이던 마쓰이는 난징 공략을 앞두고 "난징성 공략 요령"(약탈 행위, 불법 행위를 엄벌에 처하는 등 엄격한 군기를 포함)을 병사들에게 제시했지만, 이는 현장 지휘관들에게 실질적으로 무시당하게 된다.

12월 7일, 장제스는 난징을 탈출했지만, 중국군은 그대로 남아 농성전을 준비했다. 12월 9일, 일본군은 "항복 권고문"을 난징 거리에 비행기로 살포했다. 다음 날, 항복 권고에 대한 답변은 없었고 난징 총공격이 시작되었으며, 그 때 중국인 포로의 살해, 민간인의 살해가 수없이 발생한 것은 일본 측 기록에도 남아 있다. 13일, 난징은 함락되었다. 함락될 때까지 전투 지휘를 할 수 없어 쑤저우에서 요양하고 있던 마쓰이는, 함락 며칠 후인 12월 17일에 중지나 방면군의 난징 입성식을 거행할 것을 통보했고, 그 후 쑤저우에서 난징으로 돌아와 입성식에서 열병했다.[148][149] 하지만 입성식을 위한 치안이 아직 확립되지 않았고, 황족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왕(12월 2일,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에 취임)의 신변 안전 확보를 포함하여, 중국군 변의병을 두려워한 나머지 "의심스러운 자는 모두 그날 안에 처리하는 방침이 채택되었다[150]"는 이유로, 제9사단 등은 민간인 성인 남성마저 변의병으로 간주하여 의심스러운 자를 수없이 처형하는 사태가 발생했다.[151]

다음 날 위령제 전에, 각 사단의 참모장 등을 앞에 두고, 마쓰이는 그들에게 강한 어조로 훈시를 했다. 마쓰이는 "군기를 엄숙히 할 것", "중국인을 바보로 여기지 말 것", "영미 등 외국에는 강하고 올바르게, 중국에는 부드럽게 하여 영미 의존을 포기하게 할 것" 등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마쓰이는 군기의 숙정을 다시 명령하고, 아울러 중국인에 대한 경멸의 사상을 거듭 강조하며 경계했다(상하이 파견군 참모 부장 가미무라 도시미치의 진중 일기에서).[139] 마쓰이는 전후에 이 때의 일을 회상하며, 일본군의 중국인 포로에 대한 취급이 인도적이지 않았던 것도 한탄하며, "무사도와 인도"의 생각이 옛 일본군으로부터 후퇴한 것을 한탄했다.[153] 이후 도쿄 재판에서의 선서 진술서에서, 마쓰이는 병사에 의한 군기 위반의 약탈, 폭행 등의 불법 행위는 인정했지만, 조직적인 대량 학살에 관해서는 부정하고 있다.

전후, 전범으로 체포되어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기소되었다. 판결은 마쓰이가 사령관을 맡았던 중지나 방면군이 난징에서 일으킨 것으로 알려진 불법 행위에 대해, 그 방지나 저지, 관계자의 처벌을 게을리 했다는 이유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165]

1948년 12월 23일에 스 가모 형무소 내에서 마쓰이를 포함한 7명의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5. 2. 극동 국제 군사 재판 판결 논란



마쓰이 이와네는 난징 대학살을 비롯한 범죄에 대한 책임을 게을리했다는 이유로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188][189] 당시 검사였던 조셉 키넌은 이 판결에 대해 "마쓰이의 죄는 부하의 죄이기 때문에 종신형이 적절하다."라며 비판했다.[166]

도쿄 재판에서 마쓰이는 "(대량 학살은) 공식적인 보고를 받은 적이 없고, 종전 후 미군의 방송으로 처음 알았다"고 증언했다. 또한 12월 17일 난징에 입성한 후, 일부 병사의 군율 위반 보고를 받았으며, 법정에서 "난징 입성 후, 비행이 있었다는 것을 헌병대장에게 듣고, 각 부대에 조사와 처벌을 시켰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판결은 "자신의 군대를 통제하고 난징 시민을 보호할 의무와 권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행을 게을리했다."라고 단죄했다.[167]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는 마쓰이가 "전반적인 지휘관으로서 부하인 군 사령관, 사단장에게 그것을 희망하는 것 외에는 권한이 없습니다"라고 증언한 것을 두고 "권한 회피"라고 비판했다.[170] 그러나 우시무라 케이는 마쓰이가 같은 심문에서 "저는 방면군 사령관으로서 부하를 이끌고 난징을 공략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아니지만, 각 군대의 장병의 군기, 풍기의 직접적인 책임자는 제가 아니라는 것을 말했습니다"라고 답변한 것을 지적하며,[172] 마루야마가 마쓰이의 답변을 의도적으로 생략했다고 비판했다.[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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